티스토리 뷰
[ 밑줄/연결 ]
21세기 철학은 '인간'으로 부터 벗어나 '실재'로 향한다.....
'인간 이후'의 세계를 사변하는 '포스트 휴머니즘'의 철학은 사변적 실재론, 객체 지향 존재론, 다원적 실재론, 새로운 유물론, 가속주의, 행위자 네트워크 이론, 새로운 실재론 등을 포함하여, 나아가서는 인류학, 사회학, 심리학, 건축학, 페미니즘, 문학의 각 영역과도 연결되어 움직이는 가운데 인문학의 담론 그 자체를 근본적으로 전환시키고 있다.
현대 실재론은 20세기 후분부터 인문학을 석권한 포스트모던 사상을 극복하고자 하는 시도라고 말할 수 있다.
상대주의에 대항한다는 점에서 현대 실재론은 근대철학과 친화성을 지닌다.
포스트모던 사상이 혐오한 '사물자체'와 '이성' 개념을 다시 철학에 회복하고자 하는 것이다.
칸트 이후의 철학 전체를 비판의 대상으로 한다.
칸트 이후의 철학은 너무나 '인간 중심주의'였다.
'인간 이후'의 세계는 인간이 소멸한 후의 세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관여할 수 없는 세계도 가리킨다.
인간의 사유가 미치지 못하는 장소를 사유하고자 하기
전통적으로 철학에는 '관념론'과 '실재론'의 대립이 있다.
이 대립에는 '인식론'(사물을 보는 방법에 대해 생각하는 철학)과 '존재론'(존재에 대해 생각하는 철학)이라는 철학 분야가 크게 관계하지만...
우리의 흥미를 끄는 것은 존재가 인간의 인식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있다는 사태가 우리의 삶에 어떻게 관계하는 것일까 하는 것이 아닐까?
"무언가를 하고 싶은 것도 아니지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것도 아니다."
형이상학은 전체로서의 세계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고, 만물의 근본 원인 또는 궁극적인 근거를 규명한다.
원리적으로 유한한 경험을 넘어서 사변적으로 세계 전체의 궁극적인 근거에 다가가고자 하는 것이 형이상학이다.
인간 존재의 방식, 특히 스스로의 의지로 그때마다 선택하고 결정해가는 주체적 존재로서의 '나'의 존재 방식을 철학에서는 '실존'이라고 부른다.
(1) '나'가 실존적 시선의 중심이며, 세계의 의미는 언제나 '나'에 대해 개시된다는 것.
(2) 실존이란 본래 자기에 대한 배려이며, 실존적 관심의 주된 대상은 '나'라는 것.
자기 존재에 대한 불안이 가로놓여 있다...
'생활 속의 불안'이 아니라 본래 이 세계에 '나'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에서 기인하는 '존재 불안'을 의미한다.
이성적 추론의 제한 없음이 모든 경험을 초월한 형이상학에로 사람들을 향하게 하는 것이다.
이성은 '나'의 존재 불안으로부터 생명 일반의 존재로, 그리고 최종적으로 생명 일반의 존재에 대한 회의로부터 세계 전체의 존재에 대한 회의로 사유를 비약시킨다.
무언가 다른 목적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그 자신 때문에 존재하는 자기 목적적인 존재자, 요컨대 '신'이라든가 '초월적인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모든 형이상학의 근저에 존재 불안이 있다고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존재를 앞에 둔 놀람과 호기심으로부터 형이상학이 출발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신은 '높이'와 '넓이'에 이해 인간의 삶의 의미와 사회의 질서를 유지해왔다.
높이로서의 초월성은 존재 불안을 제거함과 동시에 초월적인 것에 대한 동경을 환기하고,
넓이로서의 보편성은 사회의 질서, 특히 선악의 질서에 결부되어 있었다.
하지만 근대로부터 포스트모던으로 이행하는 바로 그 과도기에 니체가 '신의 죽음'을 선언했듯이, 역사적으로 종교적 권위와 그에 기초한 시스템은 서서히 약화되고 시간과 더불어 신의 힘은 쇠퇴해버렸다.
근대 이전을 '신앙의 시대', 근대를 '자유의 시대'로서 본다면, 포스트모던은 '니힐리즘의 시대'로서 규정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니힐리즘이란 '어쩌면 모든 것은 무의미할지도 모른다'는 의혹을 말한다.
니힐리즘이란 단순히 염세적인 '기분'이 아니라 세계의 무의미함에 대한 통찰에 기초하는 '이성의 병'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니힐리즘이란 무언가 무화시켜야 할 대상을 필요로 하며, 본래 무화시켜야 할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는 니힐리즘도 존재하지 않는다.
멜랑콜리스트에게 문제는 욕망의 우울에서 나오는 '권택'와 '피로' 그리고 지금 손에 넣고 있는 의미도 얼마 안 있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환멸의 예감'이다. 요컨데 '무언가를 하고 싶은 것도 아니지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것도 아니다'라는 기묘한 욕망을 멜랑콜리스트는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니힐리즘은 절망의 한 형태지만 멜랑콜리에게는 희망도 그리고 절망조차도 없는 것이라고 말이다.
무언가를 변화시키고 싶다고 생각하더라도 그것을 위해 무엇과 싸워야 하는 것인지는 알지 못한다.
높이와 넒이가 없는 시대의 멜랑콜리스트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원리를 생각하는 것이 철학이다.
현대 실재론은 무엇인가?
철학적으로는 '20세기 후반에 융성한 포스트모던 사상을 종언시키고자 하는 운동'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그것은 새로운 '실재론'에 의해 반생대주의적인 입장을 취하고, 철학에서 '절대적인 것'을 되찾으려고 하고 있다.
퀑탱 메이야수, 그레이엄 하먼, 마르쿠스 가브리엘, 찰스 테일러, 휴머트 드레이퍼스 등
지 제기되었다.
포스트모던 사상이 씨름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은
첫째로 근대철학의 비판이고, 둘째로 근대적 개념에 대한 상대주의의 원리를 맞세우는 것이었다.
푸코의 '에피스테메', 들뢰즈의 '반복', 데리다의 '차연'과 같은 개념은 일반적으로 '인식과 앎의 상대화 원리'로서 제출되었다. 한 마디로 말하며, 그들의 관심은 '절대적 도그마'를 거부하는 것에 쏟아졌던 것이다.
상대주의는 결국 힘의 논리를 귀결로 지나게 되기 때문이다.
이성적으로 또는 종교와는 다른 모양으로 초월적인 것을 부활시키는 것....구체적으로 세 계의 커다란 도전이 있을 것
(1) 높이에 대한 도전, (2) 넒이에 대한 도전, (3) 높이와 넓이와는 다른 방식으로 현실적으로 살아갈 가능성에 대한 도전
메이야수의 '사변적 유물론'과 하먼의 '객체 지향 존재론'은 '높이'에 대한 담론을 형성하고 있다....
인간은 인간에 대한 세계밖에 인식할 수 없다고 칸트가 주장한 이래로, 또는 칸트가 미적인 것을 취미 판단으로 환원해 버린 이래로 모든 높이는 인간의 높이로 획일화되고 말았다.
테일러와 드레이퍼스의 '다윈적 실재론'은 '넓이'의 가능성을 논의한다.....
'어디에도 없는 곳으로부터의 바라 봄'을 옹호한다. 과학적 객관주의와 문화 상대주의 둘 다를 비판하고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에서의 넓이의 근거를 발견하고자 하는 것이다.
가브리엘의 '새로운 실재론'..
삶에 어느 정도의 불확정 요소가 있다 하더라도 그러한 것일 뿐이라고 참아내면서 하나하나 최선을 다해가는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다.
알 수 없는 것은 알 수 없으며, 세계 전체를 포섭하는 통일 법칙 따위는 없다.
가브리엘의 존재론은 '의미의 장'의 '복수성'을 자기의 원리로 한다.
가브리엘은 세계의 비존재를 주장하지만, 그것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세계 전체를 설명하는 단일한 세계상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함이 없는 의미에 계속해서 몰두하는 것이 - 그것 이외에 길은 없다는 자각이- 현실적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리얼'로부터 세 개의 어감을 끄집어내보자.
내가 생각해보고 싶은 것은 '정동'의 리얼이다.
나는 '정동'이라는 말을 마음의 움직임 일반을 지시하기 위해 사용한다. 따라서 쾌-불쾌, 불안이나 지루함 따위의 기분, 슬픔이나 안타까움 등의 감정을 포함한 넓은 의미에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의미의 부재'는 '정동의 침체'와 분리될 수 없다.
'의미의 부재'는 수없이 많이 있다는 것은 (지적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하고 싶은 것(욕망의 대상)이 발견되지 않는다.
나의 제안은 다음과 같다.
세계의 '의미'를 찾는 것은 일단 그만두고, '정동'의 음악을 들어본다. 이것은 정동을 둘러싼 '모험'의 시작이다.
우리는 욕망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을 찾는 것 자체에게로 욕망을 향한다.
'정동의 Good Listener가 되기'로부터 시작하는 멜랑콜리스트의 모험이다.
고쿠분 고이치로의 <한가함과 지루함의 윤리학>...
한가함은 아무엇도 할 것이 없는, 할 필요가 없는 시간이며
지루함은 무언가를 하고 싶은 데도 불구하고 할 수 없다는 감정과 기분...
한가함과 지루함의 윤리학에 대한 고쿠분의 결론은
'인간이기'를 즐기는 것과 '동물로 되기'를 기다리는 것으로 집약된다.
(전자는 일상적인 즐거움을 좀 더 깊이 향유하는 것이고, 후자는 어떤 대상 영역에 몰두하는 것이다.)
존재하는 것 그 자체를 어쩐지 나른하게 느끼는 것 - 이것이 또 하나의 형식이다.
놀이 끝에 환멸이 아니라 놀이 한 가운데서 느끼는 환멸.
적어도 놀이하고 있는 사이에는 그것이 놀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잊고 있을 필요가 있지만, 놀이하고 있는 한 가운데서도 그것이 놀이일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게 되면, 거기에는 환멸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마음에 환상이 일어나는 바로 그때에 환멸도 불온한 예감으로 따라붙는다는 것을 느낀다.
무엇을 하고 싶은 것도 아니지만, 이러한 감응하지 않는 신체를 유지해야만 하는 책무, 분명히 말해서 그것은 무거운 짐일 뿐이다. 욕망이 도래하지 않는 신체는 길가의 돌멩이와 마찬가지다.
문제는 돌멩이와 달리 실존은 실존 그 자체를 염려하고, 지금부터라도 무언가의 방식으로 실존을 유지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의무가 무거운 짐인 것이다.
멜랑콜리스트가 괴로워하는 권태, 피로, 환멸의 예감의 정체는 감응하지 않는 신체를 유지하는 것의 의무과 관계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대상이 무의미(무가치)하다는 것은 그 대상에 정동이 반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케다는 '지각', '의미', '정동'의 세 계기가 '생생한 현실성'의 본질 조건이라고 말한다....
빨갛고 둥근 사과의 지각상, '사과'라는 의미, 사과가 환기시키는 정동(나는 사과 알레르기인 까닭에 사과를 보면 혐오감이 든다)의 셋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지만, 이러한 계기들 모두가 사고의 현실성을 뒷받침하는 것이다.
의미가 정동을 환기시키는 것이 아니라 정동의 반복이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대상의 '의미'라 '기대-불안'의 에로스적인 체계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따라서 정동(기분)을 반복할 수 있다면, 새로운 의미가 만들어진다.
무언가에 감동하게 되는 '자동성- 감동은 논리 이전에 신체가 세계에 감응하는 체험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수없이 많은 의미의 장은 존재한다.
다함이 없는 의미에 계속해서 몰두하는 것이 인간의 의무이며, 그 밖에 길은 없다는 것이다.
철학은 회의를 끝까지 추구함으로써 기존의 가체 체계를 모조리 비판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불안의 밑바닥을 제시하고, 실존의 새로운 가능성을 창출한다. 이 길의 끝이 막다른 곳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면, 사람은 다른 길을 모색할 동기를 지니지 않는다.
철학의 과업은 인간과 사회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그것은 다양한 가능성의 '불가능성'을 토대로 한다.
...
'불가능성'을 철저히 자각한 자만이 새로운 '가능성'을 손에 넣는 것일면, 우리의 의무는 현대 실재론을 넘어서서 한 걸음 더 앞으로 내딛는 것일 것이다.
높이도 있고 넓이도 있는 것은 타자...
타자는 보편성의 가능성 조건인 것이다. 요컨대 타자와는 서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타자는 '나'를 초월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타자의 마음은 결코 현전하지 않는다...
그 거리는 관계 불안의 원천이지만, 그러나 또 하나의 - '나'의 관념으로는 결코 무화될 수 없는 - 의미의 원천이기도 하다....
다를 수 있는 것의 가능성을 호소해온다. 요컨데 타자는 멜랑콜리의 외부에 있는 것이다.
타자에 대한 타자가 '나'라고 생각할 때, 거기에 행위의 주체성을 다시 물을 길이 놓여 있을 것이다.
[ 자평 ] 묵직한 지적인 펀치....강하고 깔끔하다.
이와우치 쇼타로라는 1987년생 젊은 철학자의 현대 실재론 철학자에 대한 입문서이다.
다루는 철학자는 퀑탱 메이야수, 그레이엄 하먼, 찰스 테일러와 휴버트 드레이퍼스, 마르쿠스 가브리엘이다.
전반적인 핵심 키워드는 '실재'이다.
비슷힌 컨셉이지만 다루는 철학자가 좀 더 대중적인 책도 있다.
현재 일본에서 가장 주목받는 1978년생 젊은 철학자이자라고 하는 <지바 마사야> 책..
다루는 철학자는 자크 데리다, 질 들뢰즈, 미셸 푸코다. 전반적인 핵심 키워드는 '차이'와 '탈구축’이다.
책을 읽은 후 한 사람과 하나의 이론에 대해 더욱 큰 관심이 들게 되었다
1980년 생으로 세계 철학계를 이끄는 신예 철학자 마르쿠스 가브리엘 (Markus Gabriel)와 <정동 이론>
'읽은 책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폐허에 폐허에 눈이 내릴까 by 김수영 지음, 박수연 엮음 (1) | 2023.10.02 |
---|---|
생각의 요새 by 고명섭 (0) | 2023.10.01 |
절대 지치지 않는 몸 by 나카노 제임스 슈이치 (1) | 2023.09.24 |
커리어 스킬 by 존 소메즈 (0) | 2023.09.23 |
당신은 이렇게 속고 있었다 by 김규덕 (0) | 2023.09.23 |
- Total
- Today
- Yesterday
- 개발자에서 아키텍트로
-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 엔진
- 고도를 기다리며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 Ai
- 개발자가 아니더라도
- 데브옵스 도입 전략
- 함께 있으면 피곤한 사람
- 상대성이론
- 제로 성장 시대가 온다
- 파괴적 혁신
- 혁신
- 돈
- 플랫폼의 시대
- 경계의 종말
- 이노베이션
- 인공지능
- 안나 카레니나
- 양자역학
- 부정성 편향
- 함께 있으면 즐거운 사람
- 당신은 AI를 개발하게 된다
- 최진석
- 복잡계의 새로운 접근
- 사회물리학
- 경영혁신
- 직감하는 양자역학
- 스케일의 법칙
- 전략에 전략을 더하라
- 불교
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1 | 2 |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